조경희의 세상사는 이바구(7)-건 배 사

술자리나 연회석에 앉게 되면 제일먼저 건배를 들게 된다. 개인의 건강이나 행복, 사업의 성공을 축복하거나 또는 그 모임 자체의 영광이나 발전을 축원하며 서로 술잔을 높이 들어 마시는 것이 건배이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만남이나 또는 모임에 뜻을 부여하고, 또 그 뜻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건배가 없는 술자리란 단순히 마시고 먹는 식음본능을 만족케 하는데 불과할 뿐 만남의 별다른 뜻은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건배를 할 때 큰 소리로 외쳐대는 풍속이 되어왔다. 아마도 옛날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간략히 뜻을 부여하는 인사말을 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 후 잔을 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국가 간의 외교석상의 연회 때도 이와 같이 조용히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사람들이 건배를 외치던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외국의 침략의 기쁨이나 다짐 등을 소리 높여 만끽하려는 속셈이 깃들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한국도 중국도 건배를 누군가 선창하면 복창한다. 몇 년 전부터 건배를 할 때 “···을 위하여”라고 누가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은 함께 “위하여”만 복창하는 관습이 생겨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이런 말은 군대에서 만들어 졌으니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이를 꺼리게 되었고 또 일부 나이 든 사람은 일본 사람들이 걸핏하면 그들의 왕이나 국가에 대하여 충성심의 표현으로 “천왕을 위하여” “일본제국을 위하여”라는 말들을 많이 썼기에 이에 대한 거부심리로 작용되어 이 말도 한물 가버렸다.

그래서 순수한 우리나라 자축의 말을 우리가락에 뽑아낸 것이 “얼시구 절시구 지화자 좋다”에서 간추려 할 수 있다 해서 “위하여” 대신에 써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말은 한창 신이 날 때는 좋은데 술도 입에 대지 않은 첫 도입부분인 건배에서는 뭔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가 남이가”가 한창 유행되었다. 이 말은 정치권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건배의 표현도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이 말도 잘 음미해보면 참 묘한 뉘앙스가 있다. 주석에서 만난 사람이나 연회석에 모인 사람은 어떤 인연이던 연관되어 만났을 터이니 우리라는 테두리 속에 함께 넣어 공감대 형성이나 공동체 의식으로 동참할 것을 은근히 강조하면서 남(타인)으로 이탈할 수 없도록 묶어버리는데 정말 기막히게 들어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대화체 속에서 그 빈도수로 보아 자주 쓰는 말 말 가운데 “우리”가 단연 많다고 한다.

실제 우리나라가 농경 문화권으로 정착하고부터 자주 받은 외국침략과 정쟁과 파당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공동 집단속의 “나”이어야만 안심이 되는 것이다.

또 종속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한 유교문화권에서 “나”는 당연히 “저”로 낮추거나 아예 우리라는 집단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 안전 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우리가 남이가”의 “남이가”라는 말을 관련되어 맺어진 우리였지, 타인이 아니잖느냐는 뜻이다. 너무 포괄적이긴 하나 나와 남은 전혀 다르기는 하나 우주, 자연, 지구, 인간 이렇게 해보면 모두 하나에서 출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씨족, 부족을 넘고 인종이나 국경을 초월해서 남을 돕고 사랑하자고 세계적으로 강조해도 인간의 속성은 역시 자기 자신에서 출발 할 수밖에 없다.

즉 자기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가족이 있고 그 다음에 친척을 도와야하고 그 다음 마을, 지역사회의 사람이나 국민이나 인류에게 점차 확대하여 사랑과 봉사를 넓혀가기 마련이다. 어쨌든 우리는 남이 아니다 라는 말 가운데 “남”이라는 한계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좀 생각하게 한다.

단군의 자손까지 가는지. 하나님의 자손까지 가는지. 이 말에 정감이 가면서도 약간은 막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 말을 듣고 술자리에서 “나는 남이다” 라고 박차고 나올 용기가 좀 채로 나올 것 같지 않다.

특히 경상도 사람은 “남이가”보다는 “넘이가”라고 하니 토속적인 정감에 휩싸여 더더구나 뛰쳐나올 수 없게 한다. ”우리가 넘이가“도 유행을 뒤로하고 현재는 남행열차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세대 리더가 되자’, 통통통 ‘의사소통, 운수대통, 만사형통’ 오바마 ‘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길’ 등 시대상황에 걸맞게 나타난 건배사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다.

아마 우리처럼 이렇게 기발한 건배사가 생겨났다가 흘러가 버리는 것을 거듭하는 나라가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이것이 서글픈 일인지 아니면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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